삼국 통일 전쟁은 신라·백제·고구려가 주도권을 놓고 겨룬 장기 전쟁으로, 신라는 당나라와의 동맹(나당연합)을 통해 판세를 뒤집고 한반도 대부분을 통합했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군사 승리가 아니라, 외교·물류·제도 개혁이 결합된 종합 전쟁이었습니다.
배경: 세력 균형과 신라의 선택
7세기 중엽, 백제는 의자왕 대에 요충지를 연속 점령하며 신라를 압박했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집권 이후 북방 방어력과 대외 공세를 강화했습니다. 사면초가에 몰린 신라는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외교로 당과 동맹을 체결해 해상 수송 + 당군 정예라는 우위를 확보합니다. 이는 내륙전 중심의 한반도 전쟁 양상을 해상·육로 결합전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선택이었습니다.
전개 1: 백제 멸망과 황산벌
660년, 당수군은 해상으로 백제 금강 하류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남하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격파합니다. 사비성 함락과 함께 백제는 붕괴했고, 흩어진 저항은 백강 해전 등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았으나 해상 제압력에서 밀려 진압됩니다. 백제 멸망은 신라가 서해 해상로를 확보했다는 의미였고, 이후 병참 능력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전개 2: 고구려 공략과 668년 함락
신라는 요동전선에서 당과 협조하며, 남쪽에서 압박을 지속했습니다. 평양성이 압박을 받는 가운데, 내분과 장기전으로 소진된 고구려는 668년 결국 항복합니다. 이로써 한반도 북부의 공백이 발생했고, 당은 안동도호부 설치 등 직접 지배를 시도합니다. 신라는 이 구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통일을 향한 2차 전쟁을 준비합니다.
전개 3: 나·당 전쟁과 최종 판가름
당이 한반도 점령체제를 구축하자 신라는 방어선을 정비하고 반격합니다. 매소성·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육상·해상 양면 승리를 거두며 당군을 축출했고, 676년경 한강 이남과 영남·호남을 포함한 광범위한 영역을 실질 지배합니다. 이로써 통일 신라 체제가 성립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성을 확보했습니다.
전쟁을 가능하게 한 요인
첫째, 동맹 외교: 신라는 열세를 외교로 보완해 전략 자원을 끌어들였습니다. 둘째, 지휘 체계: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일원화 지휘와 군율 확립이 작동했습니다. 셋째, 병참·해상 운송: 서해·남해 해상로 장악으로 속도와 보급을 동시에 확보했습니다. 넷째, 정치 결속: 진골 귀족 주도의 권력 통합이 장기전을 지탱했습니다.
결과와 역사적 의미
통일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재확보해 경제 기반을 회복했고, 불교 문화의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또한 주·군·현 정비, 녹읍·관료체제 확립 등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했습니다. 다만 만주·요동을 포함한 대고구려 영토의 상실과 발해의 성립으로 한반도-만주 이원 체제가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완전 통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륙과 해상을 아우르는 네트워크 형성은 이후 동아시아 질서 속 한국사의 경제·문화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결론
삼국 통일은 전장 승리의 합이 아니라, 외교·군사·물류·제도의 종합 성과였습니다. 신라의 전략적 선택과 연속적 승리는 한반도 질서를 재편했고, 오늘날에도 동맹 관리·해상로 확보·지휘 일원화라는 교훈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