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광복은 곧 분단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식민 지배는 끝났지만,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까지 한반도는 국내 갈등과 국제 냉전의 소용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단순한 ‘건국’이 아닌, 복잡한 국제 정치와 민족 내부의 갈등이 만들어낸 역사적 결정이었습니다.
1. 해방 후 한반도의 상황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독립 정부도, 통일된 행정 체계도 없었습니다. 미군은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위 지역에 진주한 소련과 남쪽 지역에 진주한 미국이 분할 점령을 시행하였고, 이는 곧 남북의 분단 구조로 이어졌습니다.
- 1945.9: 미군정 수립 (남한), 소련군정 수립 (북한)
- 임시정부는 국내 진입 실패, 정권 공백 지속
- 좌·우익 대립 격화, 민중은 통일정부를 원했으나 실행 어려움
2.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신탁통치 논쟁
1945년 말, 미·영·소 3국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결과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내부에서는 좌우를 가르는 대규모 찬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 우익 세력(이승만, 김구 등): 즉각 독립, 신탁통치 반대
- 좌익 세력(조선공산당 중심): 신탁통치 수용 입장
이 과정에서 좌우합작운동도 시도되었지만, 끝내 실패하며 남북의 체제 갈등은 점점 심화됩니다.
3. UN총선과 단독정부 수립 결정
1947년, 한반도 문제는 유엔(UN)에 회부되었습니다. 유엔은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지만, 소련과 북한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UN은 감시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 국회의원 200명 선출
- 7월 17일: 제헌헌법 공포
- 7월 20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선출 (간접 선거)
-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공식 수립
4. 정부 수립과 분단의 공식화
1948년 9월 9일,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수립하면서 한반도는 사실상의 분단 국가가 됩니다. 이는 남북 모두가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며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채, 냉전체제 속 경쟁과 대립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5. 정부 수립의 의의와 한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국 근대사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 한국 최초의 민주 공화정 수립: 헌법 제정, 권력분립, 국민주권 원칙 확립
- 자주적 정부의 탄생: 외세와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한 공식 정부
- 분단의 고착화: 남북 간 통일 노력의 실패, 이후 한국전쟁의 배경 형성
정통성과 독립성 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가 제도적 기반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결론: 선택과 결과, 그리고 과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당대 지도자들과 민중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분단이라는 역사적 구조를 고착시킨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통일로 이어지지 못한 현실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를 다시 살펴보는 이유는, 당시의 선택이 남긴 교훈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함입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